가격과 가치, 그리고 기대
주가는 지금의 실적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들일 현금에 대한 시장의 기대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가치평가는 "이 회사가 얼마짜리인가"보다 "지금 가격에는 어떤 미래가 들어 있는가"를 거꾸로 읽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같은 실적을 내도 기대보다 좋으면 오르고, 기대에 못 미치면 내립니다.
PER·PBR·ROE는 하나의 식
- PER = 주가 ÷ 주당순이익(EPS) = 시가총액 ÷ 순이익
- PBR = 주가 ÷ 주당순자산(BPS) = 시가총액 ÷ 자본
- ROE = 순이익 ÷ 자본
세 지표는 따로 노는 숫자가 아닙니다.
PBR = PER × ROE (시가총액/자본 = 시가총액/순이익 × 순이익/자본)
ROE는 다시 쪼갤 수 있습니다(듀폰 분석). ROE = 순이익률 × 자산회전율 × 레버리지(자산/자본). ROE가 높아도 그 이유가 빚(레버리지)이라면 경기가 나쁠 때 크게 흔들립니다.
PER은 같아도 ROE가 다르면 PBR이 다르다
PER 10배 × ROE 5%
PBR 0.5배자본으로 이익을 적게 냄
PER 10배 × ROE 20%
PBR 2.0배자본으로 이익을 많이 냄
EV/EBITDA와 PEG
EV/EBITDA는 회사 전체 가격(EV, 1장)을 감가상각 전 영업이익(EBITDA, 6장)으로 나눈 값입니다. 빚이 많은 회사와 적은 회사, 감가상각 방식이 다른 회사를 비교할 때 PER보다 공정합니다. 통신·유틸리티·인프라처럼 설비와 빚이 큰 업종에서 많이 씁니다.
PEG = PER ÷ 이익 성장률(%)입니다. PER 30배라도 이익이 매년 30% 자라면 PEG 1, PER 10배인데 성장이 없으면 PEG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성장률 예측 자체가 틀리기 쉬워, PEG는 "이 PER을 정당화하려면 얼마나 자라야 하나"를 가늠하는 용도로 쓰는 편이 낫습니다.
배당할인 모형과 금리
회사가 영원히 일정한 비율로 커지는 배당을 준다고 가정하면, 오늘의 적정 가격은 다음처럼 간단해집니다(고든 성장 모형).
가격 = 내년 배당 ÷ (요구수익률 − 성장률)
요구수익률(금리)이 바뀌면 적정 가격은 이렇게 바뀐다
DCF는 가정의 계산기다
현금흐름할인(DCF)은 앞으로의 잉여현금흐름(6장)을 예측해 현재 가치로 할인해 더하는 방법입니다. 이론적으로 가장 정확하지만, 결과는 넣은 가정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특히 먼 미래를 한꺼번에 담는 잔존가치가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기민감주의 PER 역설
반도체, 화학, 조선, 해운처럼 이익이 경기에 따라 크게 출렁이는 업종은 PER을 반대로 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 호황의 정점: 이익이 최대라 PER이 가장 낮아 "싸 보입니다". 하지만 시장은 이익이 곧 줄어들 것을 미리 반영하는 중일 수 있습니다.
- 불황의 바닥: 이익이 거의 없거나 적자라 PER이 매우 높거나 계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시기에 주가가 바닥을 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경기민감주는 한 해의 PER보다 사이클 전체의 평균 이익, PBR, 업황 지표(가격·재고)를 함께 봅니다.
경기민감주의 PER 역설
이익 최대
PER 5배싸 보이지만 이익이 곧 줄어들 수 있음
이익 최소·적자
PER 40배 이상비싸 보이지만 주가가 바닥을 지나는 경우가 많음
가치 함정과 성장의 함정
- 가치 함정: 지표상 싸지만 계속 싼 채로 머물거나 더 싸지는 경우입니다. 산업이 줄어들고 있거나, 이익을 주주에게 돌려주지 않거나(낮은 배당·자사주 미소각), 지배구조 문제로 소수주주 몫이 새는 경우입니다.
- 성장의 함정: 높은 성장이 이미 가격에 다 들어 있는 경우입니다. 성장이 계속돼도 기대보다 조금만 느려지면 PER이 줄어들어 주가가 내립니다. "좋은 회사"와 "좋은 가격"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상대가치 비교의 함정: 무엇과, 어느 시점의 이익으로
"동종 업계 평균 PER보다 낮으니 싸다"는 말에는 두 가지 숨은 선택이 있습니다.
- 비교 대상: 같은 업종 안에서도 사업 구성·성장률·재무 구조가 다르면 배수가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매출의 대부분이 다른 사업에서 나오는 회사를 업종 이름만 보고 비교하면 엉뚱한 결론이 나옵니다.
- 이익의 시점: 지난 12개월 이익(후행 PER)인지, 앞으로 12개월 추정 이익(선행 PER)인지에 따라 숫자가 크게 다릅니다. 이익이 빠르게 바뀌는 회사일수록 차이가 큽니다. 비교할 때는 같은 기준을 써야 합니다.
리레이팅: 배수가 바뀌는 이유
주가 = 이익 × 배수(PER)입니다. 주가가 오르는 길은 이익이 늘거나, 같은 이익에 시장이 더 높은 배수를 주거나(리레이팅) 둘 중 하나입니다. 배수는 다음 요인으로 바뀝니다.
- 성장의 지속성: 일시적인 호황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성장한다고 믿게 되면 배수가 올라갑니다.
- 이익의 질과 안정성: 반복 매출 비중이 늘고 변동성이 줄면 배수가 올라갑니다.
- 주주환원과 지배구조: 배당·자사주 소각이 꾸준해지고 소수주주 보호가 강해지면, 같은 이익에 더 높은 가격이 붙습니다. 국내 시장의 낮은 배수를 두고 지배구조 문제가 자주 거론되는 이유입니다.
- 금리: 금리가 내리면 시장 전체의 배수가 올라가고, 오르면 내려갑니다.
주가 = 이익 × 배수
역산하기: 지금 가격에 담긴 성장률
가치를 직접 계산하는 대신, 지금 주가가 정당화되려면 어떤 가정이 필요한지 거꾸로 풀어 볼 수 있습니다. 앞의 성장 모형을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장이 가정한 성장률 g = 요구수익률 − (내년 현금흐름 ÷ 현재 가치)